
사고가 나면 법을 만들고, 법이 생겨서 눈을 감는다
대한민국의 안전 관련 법령과 기업 내부 지침은 해마다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산업안전보건법이 강화될 때마다 기업들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새로운 안전 규정집을 만들어냅니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규정을 준수하겠다는 수많은 서약서와 체크리스트가 쌓여갑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현장의 참혹한 사고 소식은 끊이지 않고 들려옵니다. 규정이 부족해서 사고가 나는 것일까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현실을 무시한 채 쏟아져 나오는 '탁상공론식 규정'이 사고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경영진과 입법가들은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책임을 면하기 위해 처벌 조항과 새로운 금지 규정을 덧대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그 규정들이 현장의 작동 원리와 충돌하는 순간, 현장의 근로자는 '법을 어기며 일할 것인가', 아니면 '일을 멈추고 쫓겨날 것인가'라는 잔인한 선택지에 직면하게 됩니다.
책임 회피용으로 설계된 규정은 현장의 안전이 아닌, 오직 결재권자의 안위만을 지켜줄 뿐입니다. 지킬 수 없는 규정은 현장에서 빠르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습니다.
현실을 모르는 규정이 만드는 '현장과의 괴리'
안전 지침서에는 "모든 고소 작업 시 2인 1조로 행동하며, 작업 전 주변 요소를 완벽히 통제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안전 대책입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인건비 절감과 공기 단축 압박 때문에 홀로 고독하게 사투를 벌이는 근로자가 대부분입니다. 추가 인력 투입이나 공사 기간 연장 같은 '비용과 일정'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서, 규정으로만 2인 1조를 강제하는 것은 현장을 향한 기만과 다름없습니다.
결국 근로자들은 서류상으로는 규정을 준수했다고 거짓 서명을 하고, 실제로는 기존의 위험한 방식 그대로 작업을 강행하는 이중생활을 시작합니다. 보고서 라인을 타는 정보들은 "규정 준수율 100%"라는 허울 좋은 숫자로 세탁되어 최고경영진의 결재판에 도달합니다. 현장에 가보지 않은 경영진은 서류 위에서 '우리 회사는 안전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안전 체계는 서서히 뿌리부터 썩어 들어갑니다.
진짜 안전은 규정의 두께가 아니라, 그 규정을 실제로 지키기 위해 리더가 '얼마나 많은 자원과 공기를 양보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종이 위 안전을 넘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라
사고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규정을 새로 더하는 '더하기의 안전'을 멈추어야 합니다. 대신, 현장에서 지킬 수 없는 쓸모없는 장식품 규정들을 과감히 걷어내고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규칙에 집중하는 '빼기의 안전'이 필요합니다. 최고경영진은 사무실 책상을 떠나 현장 근로자의 시선에서 법과 지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규정을 지키면서 오늘 정해진 물량을 채우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사고가 났을 때 법 조항 뒤로 숨어 근로자의 불주의를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의 모순을 직접 목격하고, 안전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병목(부족한 인력, 노후 장비, 살인적인 납기)을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규정집에 먼지가 쌓이더라도 현장의 말단 근로자가 눈치 보지 않고 "위험해서 작업을 멈추겠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될 때, 비로소 진짜 안전 경영의 문이 열립니다.
결론: 규정이 너무 많아 모두가 범법자가 되는 조직에서는 그 어떤 규정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100개의 껍데기 규정보다, 현장과 타협해 만든 단 1개의 살아있는 약속이 사람을 살립니다.